제니 조



만약 우리가 운이 좋다면, <비자트>, 2024, 2월호, 황재민


지난 11월, 전시 공간 (투게더)(투게더)에서 열린 제니조의 전시 «우리, 그리고 모든 것은 회화가 될 수 있다.» (2024, 이하 «회화가 될 수 있다.» )를 보았다. 제목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문장형의 제목은 힘이 있었지만, 조금은 주저하는 투였다. 만약 누군가 ‘모든 것이 회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선언에 가까울 것이다. 늘 그렇듯 선언은 배타적인 힘을 동반하는 언어다. 하지만 ‘회화가 될 수 있다’라는 문장은 더 모호했고, 그렇기에 보다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다. 주저하듯, 모호하고 개방적인 어조로 쓰인 제목은, 회화의 매체성을 환기하도록 만들었다. 언제나 약간 배타적인 매체로 여겨지는, 그러한 매체성을 말이다.

«회화가 될 수 있다.» 에는 작가가 ‘힌지 픽쳐 시스템’(2015~)이라 이름 붙인 ‘조립식 알루미늄 세트’ 연작이 걸려 있었다. 사각형으로 짜인 알루미늄 세트는 회화의 프레임을 닮았지만, 작동 방식은 전혀 달랐다. 프레임 위에는 그림이 그려진 천이 겹친 채로 얹혔으며, 이와 같은 설치는 언제든지 천을 들치거나 바꿀 수 있을 듯한 인상을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천이 접힌 자국을 볼 수 있었다. 그림이 그려져 마른 다음, 접힌 상태로 이동해 알루미늄 프레임에 얹히기까지, 회화의 이동 과정을 상상하게 되었다. 나아가, ‘힌지 픽쳐 시스템’의 알루미늄 프레임은 앞뒤로 움직이거나 회전시키는 게 가능하도록 유동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배타성, 즉 역사성 또는 원본성과 같은 속성이 여기선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제니조의 말을 따르자면, «회화가 될 수 있다.» 의 회화는 “과정 속의 오브제”이자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매체였다.

과정, 그리고 이동에 대한 강조는 정체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전시에는 작가가 글을 쓰고 제작한 진(zine)인 『The OBLP (Vol. 1)』 (2024)가 함께 놓여 있었다. 회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그리고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드문드문 적힌 작은 책자였다. 텍스트에서, 제니조는 어린 시절 아시아에서 서구권으로 이주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셀린 송(Celine Song)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2023)와 자신의 기억을 겹쳐 보기도 하고,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에서 격화된 아시아인 혐오와 폭력을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텍스트는 전시와 포개지면서, 회화가 이주자의 정체성을 다루는 매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이미지를 넘어 형식의 차원에서 정치를 다룰 수 있을지 질문하게끔 이끌었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미술사를 연구하는 미술가이자 미술사학자인 치카 오케케-아굴루(Chika Okeke-Agulu)는 장-위베르 마르탱(Jean-Hubert Martin)이 기획한 기념비적인 전시, «대지의 마술사들» (1989) 이후, 한국의 광주,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등지에서 국제적 비엔날레가 개최되며 동시대 미술의 정치적 풍경이 재구축되었다고 말한다. «대지의 마술사들» 은 유럽과 미국 바깥의 미술, 전통적 미술사에 포함되지 않은 미술을 집약하여 선보이며 깊게 뿌리 박힌 서구중심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문제화했다. 이러한 영향 아래, 서구 바깥에서 개최된 비엔날레들이 기존 제도의 한 켠을 차지할 때, 규범적 미술사로부터 어긋나는 실천과 이론이 가시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1980년대를 전후하여 미술은 타자와 정치의 문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는 말이며, 이는 회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회화가 될 수 있다.» 는 매체성의 문제를 넘어, 정치와 타자성이라는 문제를 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맞아들일 수 있을지 살피는 장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불확실성 속에서, 여성혐오 혹은 파시즘과 같은 반동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정치가 부상한다. 반동적 정치는 늘 토대를 찾는다. 토대 같은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 헤맨다. 토대를 벗어난 주체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기 위함이다. 회화가 아름다움, 그리고 영원성과 같은 규범을 실어 나를 때, 그것 역시 토대로 형상화되곤 한다. 하지만 «회화가 될 수 있다.» 는 회화를 토대보다 더 넓은 장소로 상상한다. 그림을 갈아 끼우거나, 회전시키거나, 언제든 다른 어떤 것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유동적인 장소로 상상하는 것이다. 이 회화들은 끝없이 열려 있으며, 가능한 모든 우연성에 개방되어 있기에, 배제되거나 경계에 머무르는 자들의 시점 역시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 회화는 항상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에, 만약 우리가 운이 좋다면, 모든 것은 회화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건 회화가 토대를 되찾는 것보다 훨씬 나은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