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조



누워있는 포크와 예수의 몸
[제니조: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 Illuminating Shade for Big Window]
Part 1.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 Sick Prophet and Old Magician
갤러리 기체 2021.04.29~2021.06.12
Part 2.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 Patron Goddesses for Idle Fellows
김세중 미술관 2021.05.25~2021.06.12

안소연
미술비평가


1. 죽음의 불가능성과 죽음 이후의 회화

누워있는 사람의 몸을 가장 먼저 봤을 때, 두 개의 형상이 떠올랐는데, 하나는 고대적인 인간 형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테이블 한가운데 논리 정연하게 놓여 있던 (그) 포크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 Untitled(after Hunter Gracchus)>(2018-2020)는 무제이지만 사냥꾼 그라쿠스를 단서로 하는 숨은 서사가 있다. 그림 속 얕은 공간에 깊이 누워 있는 사람은 그라쿠스인 게 분명해 보이는데, 그는 이미 죽었으나 죽음에 갈 수 없는 육신을 나룻배에 싣고 자신에게 임한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해 증명해 보인 사람이다. 죽음에 도착했어야 할 몸을 실은 나룻배는 수면 위를 표류하면서, 사냥꾼 그라쿠스가 죽지 않았음을 드러내며 (골고다의 십자가처럼) 육신의 현전을 환기시킨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에서, 얇은 천을 덮고 나룻배에 누워 있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몸은 만테냐(Andrea Mantegna)가 그린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떠올려 준다. 사실, 만테냐의 (고대적인) 인간 형상을 전유(appropriation)하여 모리스(Robert Morris)가 표현했던 더치 슐츠(Dutch Schultz)의 몸을 재전유(re-appropriation)한 제니 조의 회화는, (표면적으로는,) “죽어있는 육신”의 현전을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복잡한 사건들을 추려내 참조한다. 나룻배는 죽은 자의 관에 대한 은유로서, 제니 조는 또 다시 데이나 슈츠(Dana Schutz)의 열린 관을 연상시키듯, 죽음의 불가능성에 직면한 육체의 머리맡에 평평한 침상을 두는 대신 깊숙한 추상적 공간감을 암시하며, 현실에서 반복되는 유예된 시간들에 대해 더듬어 볼 자리를 내어놓는다.

이때, 만테냐와 모리스와 슈츠의 회화에서 “죽임 당한 육신”이 지닌 함의는, 그 육체에 대한 낙인과 그 육체에 주어진 희생이며 그 대속(redemption)에 의한 (낙인 찍힌 자들의) 구원이다. 그리고 이 죽음의 형상은 제니 조에 의해 다시 전유돼 회화에 관한 죽음(과 구속)의 서사로 재맥락화 된다. 말하자면, 만테냐가 회화에서의 고전적인 인간 형상(의 서사성)과 새로운 원근법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것처럼, 모리스가 만테냐를 전유하여 회화의 신화적 서사성을 당대의 사건과 교차해 놓았는데, 제니 조는 그라쿠스에 대한 문학적 서사로부터 (시간을 되감아) “죽음의 불가능성”에 관한 표상으로 작용하는 “죽어있는 육신”에 대한 회화적 전유의 역사를 뒤적이는 듯하다. 즉, 만테냐와 모리스, 슐츠와 슈츠, 그들 사이를 기이하게 가로지르는 카프카(Franz Kafka)와 소설 속의 그라쿠스, 일련의 이 개별적인 사건들이 함의하는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언적 결말을 제니 조는 시대착오적 연쇄로 병치 시켜 펼쳐 놓은 셈이다.

(그) 포크에 대해 말하자면, 전유한 역사들 보다 차라리 더 멀게 느껴질지도 모를, 무려 2008년 그의 작품으로 관심을 (잠시) 돌려 놓아야 한다. <정물 사진 부조 Still Life Photo-Relief>(2008)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진 부조의 형식을 취하며, 제니 조가 초기 작업으로 분류해 놓은 범주에 속한다. 주로 “in-between(중간자)”이라는 이슈로 조명되는 2008년부터 2015년까지의 회화 작업 중에서도, <정물 사진 부조>는 가장 초기 작업의 맥락을 보여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를 보자마자, 내가 떠올린 기억은 만테냐의 회화에 등장했던 인간 형상과 제니 조의 평면 작업 한 가운데 깊숙이 누워 있던 포크였다. 만테냐의 회화를 전유해 더치 슐츠라는 마피아의 죽음을 중첩시킨 모리스의 작업에서 직접적인 참조점을 끌어와 이를 다시 전유한 제니 조의 회화에서, 공교롭게도 나는 그의 가장 초기 작업을 단번에 떠올렸는데, 화면 속 깊숙한 원근법적 공간감을 단축해 놓은 그 포크(의 포즈)가 실은 탁자 위에 낮게 부유하듯 보이는 이미지의 실체처럼 느껴졌던 기억 때문이었을 테다. 이를테면, 죽음의 불가능성을 증명해 보인 “죽어있는 육신”의 현전처럼 말이다. 그때, 제니 조가 길게 논의를 이어갔던 “in-between” 개념에 주목해 본다면, 사진 부조의 형식이 전유하고 있는 회화적 원근법과 그 전유를 (곧 다가올) 이미 과거가 된 동시대 회화가 참조해냈으니 회화사의 시나리오를 투영해 본다면 <정물 사진 부조>는 제 죽음 이후의 망상을 예언한 셈이기도 하다.


2. 시대착오적 중간자

제니 조의 개인전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 Illuminating Shade for Big Window⟫는 두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 Sick Prophet and Old Magician⟫라는 제목으로 갤러리 기체에서 진행되며, 두 번째 파트는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 Patron Goddesses for Idle Fellows⟫으로 김세중 미술관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열린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는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를 포함해 11점의 회화로 구성되었고,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에서는 초기 작업과의 단절(혹은 그것의 확장)을 알리며 2016년부터 설계된 “힌지 프레임 세트 Hinge Frame Set”가 전시의 중심축을 이룬다.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는 2017년 신도문화공간에서의 개인전 제목을 다시 가져온 것이며, 각 파트의 전시 제목 또한 장 바티스트 오드리(Jean Baptiste Oudry)의 회화를 전유해서 그린 자신의 그림 제목과 예전 작업의 제목을 각각 참조해 그대로 가져오거나 변형해서 쓴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들은 전유와 참조를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정체성의) 범주화에 착오를 일으키며 선형적 계보의 미덕을 자기 품에 안고 내파시켜 비선형적 역사 쓰기의 (불)가능성을 죽음의 불가능성에 처한 사냥꾼의 육체처럼 눈 앞에 현전해 놓으려는 어떤 이의 속내를 비춘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의인화 된 회화의 육신을 향해 있다.

제니 조는 전유의 방법을 통해 시대착오적 중간자/매개자로서 회화 역사의 둘레를 자유롭게 선회한다. 자유롭다는 말은 쓸모 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관을 지고 기약없이 현실의 수면 위를 떠돌아다니는 (죽은) 사냥꾼 그라쿠스의 육체가 연상시킨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기에 적절한 단어일 지도 모르겠다. 수수께끼 같은 제목의 <회화는 미래다 The Future is Painting>(2017-2020)를 보면, ‘여기서 회화는 무엇이며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인가?’하는 물음이 애먼 그림과 충돌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의 제목이 (무거운) 질문들을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출(터너를 따라) Sunrise(after Turner)>(2020)의 강렬한 태양 빛과 유머러스한 대구를 이루듯 선명한 그림자를 품고 있는 이 회화적 공간-곧 장소성으로 구체화 되는-은, 회화에 대한 시간성으로 마술적인 이동을 감행하여 전시 안에서 회화 간의 역사적 관계와 서사를 특정하는 데 어떤 의미를 파생시킨다.

<일출(터너를 따라)>에서는 하단의 2020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설익은 당대의 시간을 일깨워 주지만, 그 숫자로서의 가변적인 시간과 떠오르는 태양 빛이 공간-대부분은 대기라고 부르지만-을 빈틈 없이 채운 현상적 시간은 제니 조의 회화에서 19세기의 태양 빛과 (서울 한복판에서) 21세기의 태양 빛 사이의 비약적인 “이접”을 성사시킨다. 동향으로 난 큰 창문으로 밝고 뜨거운 태양 빛이 매일 들어와 실내 공간을 모조리 용해시켜 버릴 것 같은 체험적 서사에서, 제니 조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풍경화가 일으킨 회화의 역사적 성취를 참조하여 공감에 다다른다. 말하자면, 현실의 설명하기 어려운 시지각의 인식에 있어서 그는 (터너가 창안해낸 것과는 반대로, 되레 그것을 전유하는) 회화 형식을 가져와 매체에 대한 재귀적 추론에 다가간다. 이를 위해, 그는 시대착오적 중간자로서의 입장을 유지하는 편이다.

<회화는 미래다>의 경우,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 The Balcony(after Magritte)>(2017-2020)와도 희미하게 연결된다. 간결한 서양식 앤틱 서랍장 위에는, 마치 <정물 사진-부조>를 보듯, 크고 작은 카톨릭 성물과 이국적인 장식물과 전자 시계 및 크리스마스 카드가 정갈하게 놓여있다. 할머니의 세련되고 오래된 고급 취향에 새롭게 얹어진 개종의 증거물들이 성모 마리아의 머리 (그림자) 끝에서부터 서랍장 양쪽 모서리까지 이어지는 원근법적 공간을 차분히 구축해내고 있다. 제니 조가 “(새로운) 바로크 양식에 관한 회화적 탐구”라고 언급했던 이번 전시에 관한 설명에서, 나는 일련의 극적인 빛의 대비와 과장마저 소진돼 버린 “(새로운) 바로크적” 기이한 변형 위에 죽음의 불가능성을 표상했던 육체(들)의 형상을 중첩시켜 본다.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에서, 제니 조는 밋밋한 서울 아파트 벽지 앞에 놓인 서양식 앤틱 서랍장 위 성물과 장식물의 (축 늘어진) 상징처럼 “발코니”를 캔버스에 가져왔다. 마그리트(René Magritte)에 대한 참조이자 전유인 이 회화에서, 제니 조는 (이 또한 시대착오적인) “정체성”의 이슈를 끌어와 더 얹는다. 마그리트는 마네(Edouard Manet)의 발코니를 전유하고, 마네는 고야(Francisco Goya)의 발코니를 전유하였으며, 이 전유의 역사/족보를 따라 제니 조는 마그리트를 다시 전유해, 화면 가득 발코니의 패턴을 그려 넣었다. 발코니와 그 너머의 회화적 공간 안에 역사적인 화가들이 등장시킨 대상은 (고전적) 인간 형상으로 압축되는데, 마그리크에 와서 인간 형상을 환기시키는 육면체, 즉 죽어있는 육체의 현전이라 말할 수 있는 관으로 변형됐다. (그 족보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하지만 어떤 죽음에 의해 구원받은) 제니 조는, 무거운 관-본유적으로는 서사적인 인간 형상-을 전유하는 대신 그 모퉁이에 있는 꽃과 그것을 장식해주는 발코니의 패턴을 가져다 그리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이 유머를 전유의 오류/오작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 상관없겠다.

육체가 사라진 <베드룸 페인팅 The Bedroom Painting>(2017-2020)이 아무 것도 전유하지 않고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와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 사이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그는, 애초에 오테사 모쉬페그(Ottessa Moshfegh) 소설 속 주인공의 육체를 위한 빈 공간으로 상상했던, (진부한) 회화의 공간을 반복한 셈이다. 이는, 예전에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 Running in Circle Backwards(After Malevich)>(2014)에서 전유의 형식을 통해 동시대성의 시대착오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제니 조의 회화에 대한 성찰과 유머를 떠올리면서, 계속해서 그(의 망상)를 쫓게 한다. 비어 있는 침대는 <일출(터너를 따라)>를 거부할 수 없이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화가의 자리이며, 죽어있는 형상이 죽음의 불가능성의 현전을 나타낼 예언을 담은 회화의 자리이며, 우울증에 시달리며 약을 과다복용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처지와 같은 회화의 (죽음을 위한) 변증법적 자리일 수도 있다. (회화는 자기의 서사를 만든다.)


3. 뜬 구름과 떠오른 구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 Spheres, Mirrors and Folded Papers (a4er Turner’s Perspective Chart)>(2017-2020)를 보고 <정물 사진 부조>를 다시 떠올렸다면, 그것은 이제 나의 지나친 망상인 걸까? 과거 어느 때에, 누워있는 포크 주변을 입체적으로 감싸고 있던 미러 볼과 잘린 테이블보와 화면 너머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를 누군가 알아챘다면,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가 그 오래된 작업이 봉인되어 있는 작업실 책상 서랍에서 그림 그린 이의 노트와 함께 발견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내 망상에 대해 너무 정색하지 말기를 바란다.

제니 조는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에서 터너가 원근법 강의를 위해 준비한 드로잉을 전유했다. 시지각의 논리를 입증한 터너의 드로잉 차트는 흥미롭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니 조는 그것을 전유하여, (들고 다니느라) 접어 놓은 종이 위에서 망막(의 한 점)으로부터 쏟아지는 질서정연한 원근법적 시지각의 피라미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상상하다가 모순과 불가능성을 잔뜩 지닌 회화 여덟 점을 그려 놓은 듯하다. 정사각형의 이 회화 연작에서, 제니 조는 구와 거울과 접힌 종이의 열화된 이미지들, 말하자면 “죽어있는 육체”와도 같은 허상들을 스승 삼아 쫓고 있다. 그것은 또 동시대의 회화로서 손색 없는 참조들을 걸친 채 회화의 역사로 회귀하(려)는 진지한 물음들을 남긴다. 제니 조가 초기 작업에서 서양 회화사의 원근법적 시지각의 논리를 탐구하며 재현해내고자 하는 실험에 몰두했다면, 최근 몇 년 간의 작업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는 회화사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전유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회화적 성취(의 불가능성)에 대한 당위를 더욱 모호한 국면으로 끌고 간다.

전시장에 기념비처럼 놓인 <힌지 프레임 세트-흰 색과 검은 색>(2015)를 보자. 내부가 텅 빈 알루미늄 프레임 구조물은 제니 조가 2015년부터, 마치 접힌 종이를 펼쳐 놓은 것처럼 이동과 보관에 용이한 회화 프레임 구조로 설계한 결과물이다. <힌지 프레임 세트>는 회화적 조건에 대한 실험을 가동시켜 그 결과물의 유효성을 알리는 일련의 마술적인 무대와 같다. 그는 여기에 햇빛 가리개로 쓰였던 빛 바랜 (대가들의) 회화 이미지들을 망막에 드리워진 시지각의 한계를 뚫고 일체의 숨김없이 보여줬었다. 이번에는 그 열화된 회화 이미지들의 지지체에 불과한 <힌지 프레임 세트>를 전시장 한 가운데 세워 놓고, 그 비어 있는 큰 창들에 새로운 원근법을 그려 넣기로 한 모양이다. 제니 조는 허공에 떠오른 구 대신에 구름을 놓았다.

모두 (그) 구름을 가리킨다. 큰 창을 향해 제니 조는 증강 현실(AR)로 구름을 보여준다. 유머러스하고 세속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구름을 모두가 쫓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직선의 피라미드를 평면에 그릴 필요가 없다. 비정형의 자국들을 남기며 움직이는 구름을 따라 (예정된) 경로 안에서 구름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만이다.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 Patron Goddesses of Idle Fellows are the Clouds>(2021)에서, 제니 조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고대 그리스 희극 「구름」을 참조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유머와 풍자를 빌려 와, 그는 역사적인 회화의 매체적 조건에 대해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가?”하는 물음을 던지다가 또 다시 (누군가가 예언했던) 동시대 회화의 새로운 위상에 대해서도 “귀여운” 망상을 더해 나룻배를 타고 수면 위를 떠도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죽어있는 육체 같은 구름을 유희하며 쫓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나룻배 혹은 열린 관을 연상시키는 그 깊은 추상적 공간으로서의 “힌지 프레임 세트”에, 제니 조는 떠도는 정체성으로서의 화가인 자신의 원근법적 풍경들을 옮겨다 놓았다. 서울에서 본 (비서구 대가들의) 회화들, 서울과 뉴욕과 휴스톤의 풍경들, 회화에 대한 자신의 원근법적 시각을 담은 구조물 드로잉들, 일련의 위계 없는 이 이미지들을 포토샵으로 편집해 UV 프린팅 하여,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를 눈 앞에 가져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