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조



‘회화는 미래다’: 제니 조의 대안적 회화의 조건, 2021, 이채은


제도로서의 회화

회화는 오늘날 유효한가? 이는 제니 조가 이번 개인전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에서 화두로 내세우고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우리는 여러 맥락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첫째, 다다이즘에서 개념미술로 이어지며 가속화된 미술의 개념적 전환 이후 매체 특정적 가치를 찾는 시도가 무색해졌다. 더이상 매체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개념적 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 응용 및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회화’라는 카테고리 자체의 의의도 모호해진 것이다. 둘째, 미국의 비평가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1981년에 「회화의 종말 The End of Painting」이라는 글에서 진단했듯 회화는 1960년대 이후로 수많은 비평가와 작가들에 의해 이상주의와 엘리트주의 및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산물로 비판받아왔으며,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1 이러한 조건 속에서 회화는 의미있는 카테고리로 존속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위해 선제되어야 할 회화의 대안적 조건이란 무엇인가? 제니 조의 작업은 이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BBC TV 시리즈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1972)에서 존 버저(John Berger)는 유럽의 회화 전통을 뒷받침하는 사회문화적 관습과 법칙을 파헤쳤다. 그는 유화나 원근법과 같은 회화의 장치에 대한 설명과 일련의 상호연관된 이데올로기 – 가령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본주의 및 식민주의 – 의 전개에 회화가 미친 영향을 탐구하면서 관객이 회화의 보편성, 객관성, 자율성에 대한 신화적 환상을 깰 수 있도록 했다. 버저의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 페미니즘 미술, 제도비판적 미술 등의 등장과 함께 가속화된 미술의 전통 혹은 ‘제도로서의 미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회화의 전통과 이를 동반한 관념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가를 천재적 개인으로, 작품을 유일무이한 개별의 창조물로 보는 낭만주의적 인본주의의 시각은 미술 시장의 핵심 논리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타자에 대한 상품화 및 (성적) 대상화의 경향도 특히 광고나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미술 및 미술사의 ‘글로벌화’에 대한 논의가 크게 확장하고 있으나 미술계과 미술사학계에 뿌리깊게 침투해 있는 식민성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국에서 교육 받은 한국 여성 화가라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서구 전통과 제니 조 작가는 꽤나 ‘어색한’ 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작가는 본인의 정체성을 기존 회화의 전통 안에 단순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회화의 언어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몰두한다. 즉, 제니 조 작가의 이번 작업들은 본인의 문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역사적 담론의 변화에 기반하여 회화의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이번 전시에서 드러나는 제니 조 작가의 방법론적 특성을 ‘차용’, ‘다층성’, ‘관계성’으로 파악하고 어떻게 이 개념들이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대안적 회화의 조건: 차용, 다층성, 관계성

현재 갤러리 기체에 전시되어 있는 작업들은 전부 회화인데, 그 중 상당수가 서양 미술사의 주요 화가 및 작품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런 과거로의 재귀는 일견 시대착오적인 것 – 회화의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한 낭만적 소회 – 으로 읽힐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셰리 레빈(Sherrie Levine)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이 차용을 통해 원본의 내재적 가치를 무효화하고 가치가 생성되는 원천으로서 사회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경우를 떠올려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제니 조의 차용은 과거에 대한 향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통에 대한 불경하거나 유희적인 태도보다는 시공간의 다층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회화의 개념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 비교해볼 수 있는데, 팔림프세스트란 고대에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긁어내거나 흐릿하게 한 후 새로 쓴 문서를 일컫는다. 이 때 기존의 글자들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아 그 흔적이 남아있게 된다. 표준화, 직선화, 분절화된 현대의 시공간 관념과 달리 불연속적인 시공간이 중첩되어 공존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니 조는 그가 평소에 접했던 회화, 영화, 또는 문학 작품들을 지표삼아 그 안에서 마주한 다양한 시공간들을 회화 속으로 끌어온다. 가령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2018-2020)는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 Lamentation of Christ>(1480)를 전후 미국 작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1989년에 차용해 그린 <금지의 종말 또는 더치 슐츠의 죽음 Prohibition’s End or the Death of Dutch Schultz>을 모델로 하여 그린 작품이다.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2017-2020)와 <어려운 횡단(마그리트를 따라)>(2017-2020)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동명의 작품을 차용한 것으로, 원작에서 특정 디테일(발코니의 난간과 배가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는 그림 속의 그림)을 추출해 다른 시공간의 파편들과 함께 재구성했다. <정물(라르장을 따라)>(2017)는 프랑스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돈 L’argent>(1983)에 나오는 한 장면을 기반으로 그린 것인데, 이 작품 또한 1911년에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가 쓴 소설 『위조 쿠폰 Forged Coupon』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한편 <일출(터너를 따라)>(2020)은 초월적 성격의 숭고미와 대기의 변화하는 순간성을 융합한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J. M. W. Turner)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하단에 트롱프 뢰유(trompe-l’oeil) 기법으로 작품 제작 연도 표기(2020)를 그려넣음으로써 초현실주의적인 층위를 더했다.

많은 경우, 작가가 확대하거나 추가 및 수정한 요소들은 작가 본인의 중간자적인 정체성, 여러 지역을 떠도는 유목민의 삶, 서로 다른 문화권이 복잡하게 만나는 만남의 순간 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난간의 이미지는 관람객의 공간과 꽃이 부유하는 모호한 추상의 공간을 분리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열린 구멍 사이로 이 공간들을 연결시키기도 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의 경우 작가는 원작의 침상의 자리에 배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소설 「사냥꾼 그라쿠스 The Hunter Gracchus」(1931)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냥꾼 그라쿠스는 망자도 산자도 아니며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운명에 처한 것으로 그려진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장 밥티스트 우드리를 따라)>(2020)는 라퐁텐(La Fontaine) 우화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잘 알려진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우드리(Jean Baptiste Oudry)의 <늑대와 양 Wolf and Lamb>(c. 1751)을 재구성한 것으로,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치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포착했다. <회화는 미래다>(2017-2020)는 좀 더 작가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레퍼런스를 활용한 작품이다. 이 정물화에 등장하는 종교적인 공예품을 비롯한 여타 장식품들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작가의 할머니가 미국과 한국에서 다양하게 사 모은 것들이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도상들을 복제한 것들, 작은 프란시스 교황 조각상, 눈사람 모양의 크리스마스 기념품,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진 시일의 단서가 되는 시계와 달력 등이 서로 다른 시공간을 복잡하게 연결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가로지르는 작가(와 작가의 할머니)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제니 조는 작품의 전체적 짜임을 구상하고 배치하는 데 있어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성 또한 드러내고자 했다. 각각의 작품들은 일견 아주 다른 모티프와 스타일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들을 전시장에서 함께 놓고 보았을 때 작품들 사이에서 어떠한 의미의 주고받음이 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의 침상/배 옆에 놓인 <베드룸 페인팅>(2017-2020)를 예로 들어보자. <베드룸 페인팅>은 젊은 미국의 소설가 오테사 모쉬페그(Ottessa Moshfegh)의 9/11 테러 직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 『휴식과 완화의 한 해 My Year of Rest and Relaxation』(2018)에 영감을 받아 그려진 것인데,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철회하고 싶어 각종 약물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잠을 자며 사는 삶을 설계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룸 페인팅>에서 생기 없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침실 이미지로 표현되었으며,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가 전달하는 그라쿠스/예수의 이야기에 현대적인 층위를 덧붙이는 기능을 한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장 밥티스트 우드리를 따라)>와 <일출(터너를 따라)>의 병치도 흥미롭다. 두 작품 모두 동적인 붓질을 활용한 반추상의 형식과 단색조 혹은 매우 적은 수의 색조를 활용하여 아주 작은 스케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법칙 – 지구의 자전과 약육강식의 법칙 – 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해 낸다는 점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제니 조의 회화 작품들은 하나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의미와 정서의 확장과 변모를 다각도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관계성은 김세중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의 두 번째 파트에서 회화 이외의 작업으로까지 확장된다. <힌지 프레임 세트>(2015~)와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2020)은 각각 건축적 요소와 증강현실(AR)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작품으로, 제니 조의 개념적 실험이 회화 이외의 매체로 구체화된 예시로 볼 수 있다. <힌지 프레임 세트>는 직각의 알루미늄 프레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립할 수 있게 한 가변적인 걸개 시스템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박서보나 민중기 같은 한국 작가들의 전시 전경을 찍은 사진과 서울, 뉴욕, 휴스턴에서 찍은 다양한 도시 및 자연경관의 사진들을 유리 패널에 프린트해 함께 전시했는데, 이 사진 이미지들은 포토샵을 통해 합성되고 필터가 입혀져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게끔 처리됐다. 이 유리 패널들은 여러 가지 각도와 배열로 <힌지 프레임 세트>상에 설치되어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에서의 전시 방식과 대비를 이룬다.

한편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은 AR 기반 작품으로, 관객은 타블렛을 통해 전시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여러 이미지들을 지우기도 하고 새로 보여주기도 하는 구름 이미지를 볼 수 있다.2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이라는 말은 작품의 전거가 되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고대 그리스 희극 <구름 The Clouds>에서 구름을 조롱조로 묘사하는 데서 따온 말인데, 소크라테스와 같은 한가한 사상가들을 수호해주는 것은 모양만 화려하고 실속은 볼 것 없는 구름뿐이라는 뜻이다. 제목만 보면 작가가 회화 또는 예술 전반을 조롱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름은 – 상술한 새로운 회화의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게 – 주변 공간 및 이미지들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자유로운 궤도를 그리는 유동적인 주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회화는 미래다

제니 조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회화를 유일무이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보다 유동적이고 다원적이며 관계적인 존재로 변모시켰다. 작가의 이러한 관심과 방향성은 그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 새로운 회화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비평가 얀 베르보트(Jan Verwoert)의 회화의 ‘인접성(adjacency)’ 개념을 들 수 있다.3 베르보트가 말한 ‘인접성’이란 단순히 말해 ‘연결 통로’의 역할로서의 회화의 가능성을 일컫는 것으로, 회화를 우리는 전통적 개념의 ‘세상을 향한 창문’도 아니고 모더니스트들이 말한 ‘평면 그 자체’도 아닌, 회화 이외의 개념이나 사물, 세상 ‘옆에’ 존재하며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연결통로’로 개념화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보트의 강연 중에 이 새로운 회화 개념을 셀로판지로 만든 커튼에 비유한 점이 흥미롭다. 색깔과 텍스쳐의 왜곡이 일어나는 이 반투명의 커튼처럼, 회화란 회화 너머의 세상을 불완전하게 보여주는 가림막이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거두어져서 그 너머의 세상을 직접 연결시켜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미술사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 또한 ‘이행적 회화(transitive painting)’라는 개념을 통해 유사한 관점을 전개한 바 있다. 「회화 옆의 회화 Painting Beside Itself」라는 글에서 그는 유타 코외터(Jutta Koether)나 레베카 퀘이트만(R. H. Quaytman)과 같은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작품은 예술적·사회적 맥락의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놓여져 “무한한 이탈, 분절, 퇴색”을 반복하는 회화의 상태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분석했다.4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의 관점에서 제니 조의 작업이 의미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회화의 유동성과 다원성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에 서구 중심의 회화사에서 비껴있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가치 체계를 구성했던 ‘자신과 타자’, ‘아방가르드와 시대에 뒤떨어진 미술’, ‘보편성과 특수성’ 등의 이분법적 사고는 인종이나 국적, 성별 등으로 인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작가들을 이중의 곤경(double bind)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이들은 시대에 앞서있으며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표방하는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계로부터 거부당한 동시에 언제나 성별이나 인종의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해석되었고, 이들의 작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미술’ 혹은 ‘보편성이 결여된 미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제니 조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의 의미는 물론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이 중 핵심적인 한 가지는 방금 설명한 ‘이중의 곤경’으로부터 작가와 작품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데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가 조명하는 시공간 및 문화의 다층성, 다원성, 관계성의 논리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부수적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회화는 오늘날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의 작품 제목 중 하나가 선언적으로 말했듯 회화야 말로 ‘미래’를 열 수 있는 잠재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채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현대미술 석사를 받고, 현재 뉴욕시립대학교(CUNY)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활동한 아시안 아메리칸 및 아시안 이민 작가들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중이며, 크게는 국가·문화·제도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작업한 작가들에 관심이 있다. 2016년 이후로 퀸즈 칼리지와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1 Douglas Crimp, “The End of Painting,” October 16 (Spring 1981): 69-86.
2 김보원(AR), 김도연(AR), 곽지원(사운드), 추승민(사운드)이 이 작품의 제작에 함께 참여했다.
3 Jan Verwoert, Presentation at Cranbrook Academy of Art, April 23, 2013, https://www.youtube.com/watch?v=6EgrzcWTKN0&t=3833s.
4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 (Fall 2009): 125-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