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조



현대예술가로서 회화를 제작하는 과업이 의미하는 바, 2013, 임근준 aka 이정우


.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1.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누구의 손으로 그릴 것인가? 하나하나 결정을 잘 내려야 현대적 의미의 화가가 된다. 무엇 하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전문가라고 해도, 구시대의 화가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각 결정 과정에서 화가에게 현대성/당대성/무시간성(modernity/contemporaneity/atemporality)의 부담을 지우는 것은, 미술의 역사와 당대의 시각 문화다. 당대의 시각 문화가 시간의 가로축에서만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술의 역사가 시간의 세로축으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인 미술가의 경우, 구미의 미술사와 일본의 미술사를 지역의 미술사와 겹쳐 고찰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꽤 골치가 아프다.)

2. 하지만, 시간의 가로축과 세로축에 대응해, 하나하나 판단을 제대로 내렸다고 해도, 우수한 작품 생산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situation)에 맞춰 ‘그리기’라는 행위를 미적으로 유효한 형식으로 재정의하고 재발명하는 일에 도전했다고 해도, 대개는 담론적 (재)설정에만 성공했을 뿐이기 십상이어서, 최종 결과물은 영 별로인 경우가 적잖다. 특히, ‘붓질’로 승부를 거는 ‘회화적’ 회화(‘painterly’ painting)를 시도하면, 난이도가 확 높아진다.

3. ‘회화적’ 회화의 남다른 화면은 손에 익은 노하우 등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의해 창출되는 법이기 때문에, 재료와 도구의 준비-관리가 미비하거나, 타고난 손재주의 운용이 부적절하거나, 작업량이 적어 손이 굳어버리면, 최종 결과의 질은 급격히 저하되고 만다.

4. 어떤 신인 화가가 제 주제-물(subject matter)을 찾았다고 하면, 그건 평생에 걸쳐 진행될 화업(畵業)의 대주제를 구체적 주제로 포착했다는 것과 함께, 그를 표현할 최적의 질료와 형식을 찾았다는 뜻이다. 모 정치인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나지막이 일갈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그 반대다. 즉, 작업 내용이 형식을 강제할 때, 비로소 그는 주제-물을 찾은 행운아가 된다.

5. 그러나, 주제-물을 찾았다고 해서 평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주제-물을 각각의 화폭으로 전개하며 시각화(visualization)하고 구체화(reification)할 때, 역시 여러 변수가 등장하고, 각 변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길고긴 생존 게임의 성패가 갈린다. 성공한 화가라면 하나의 소주제를 연작으로 전개해 제 작업 시기를 명료하게 연출해내는 과정에서, 미술관 소장용 캔버스와 미술관급 소장가용 캔버스와 아트페어용 캔버스와 프린트 에디션을 적절히 조합해 군단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를 관습적으로 따랐다간 구시대의 미술가—이른바 ‘환쟁이’—로 전락하는 수도 있다.

6. 소주제에 복속하는 한 시기에서 다음 시기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자기-참조성(self-referentiality)을 어느 정도까지 구현해놓을 것인가 하는 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가들에겐 고민거리다. (대개 이름난 모더니스트 미술가들은 자기-참조적 창작을 통해 제 작업세계를 하나의 주제로 일관했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일생을 독자적 양식의 대서사로 연출하려 애썼다.) 각 시기를 종합해놓았을 때 한 눈에 조망되지 않는 기승전결의 서사적 풍경이 그려져야, 평론가 집단과 예술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화가가 되는데, 역시 이러한 연출이 작위적으로 뵈면 최종 평가가 높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신인 화가 제니조의 경우는 어떠한가?

. 제니조의 경우

1. 제니조(Jenny Cho, 1985-)는, 화가가 대상을 보는 방식을 최적의 회화 양식을 차용해 종합하는 일에 뜻을 둔 화가다. 2008년 뉴욕대학교(NYU) 회화과(Studio Art)를 졸업한 뒤, 2009년 뉴욕 가나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인-비트윈(In-Between)>을 열며 데뷔했고, 2011년 뉴욕 두산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 <인-비트윈(In-Between)>을, 2013년 서울 두산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 <인-비트윈: 롭 로이드의 이야기(In-Between: Story of Rob Lloyd)>를 개최했다.

2. 제목으로 내세운 ‘인-비트윈(In-Between)’ 즉 ‘중간자’ 혹은 ‘중개자’는 작가가 내세우는 작업 방법(method)으로, 다음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사물을 그리는 것 보다는 사물을 보는 내 자신의 시각에 초점을 맞췄고, 그런 계기로 시지각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시간을 두고 대상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무엇을 보는지 보다는 어떻게 보는지에 더 집중했다. / 이 과정에서 포토 릴리프 작업을 시작했는데, 실제 장면을 촬영하고 이를 사진 부조로 만든 후 다시 페인팅으로 옮겨 표현하는 방식이, 사람의 인식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작업에서는, 실제 촬영한 대상을 사진 부조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입되는 ‘시간성’과 ‘반복성’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페인팅에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통합적 시지각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다. 나는 이를 “인-비트윈(In-Between)”의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3. 즉, 대상과 공간의 시각적 인식과 인지의 과정을 유비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자신의 방법을 ‘중간자/중개자(In-Between)’로 명명하고, 그를 통해 다층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통합자로서의 화폭—회화적 인식의 종합자로서의 의의를 지니는—을 그려낸다는 뜻이다. 물론 “통합적 시지각”이란 목표는, 화가 특유의 망상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런 헛소실점(불가능한 목표)은 작가의 회화 충동을 자극하는 원천이 될 것이니 무해한 환영이라 하겠다.

4. 그런데, ‘화가가 대상을 보는 방식을 최적의 회화 양식으로 종합하는 일에 뜻을 둔 화가’라는 규정은, 제니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목표는, 폴 세잔에서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의 파블로 피카소와 일군의 미래파 화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이미 도전했던 바다. 물론, 제니조는 ‘화가가 대상을 보는 방식을 최적의 회화 양식을 차용해 종합하는 일에 뜻을 둔 화가’이므로 한 세기 이전에 활동했던 모더니스트 화가들과는 사뭇 상이한 역사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화한 회화 양식을 차용해 대상을 보는 회화적 방식을 종합해내는 실험은, 이미 전성기의 데이비드 호크니가 돌파한 과제. 그렇다면, 제니조의 메소드는 호크니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5. 전성기의 호크니의 위대함은, 역사적 회화 양식을 유희적으로 차용하며, 자신이 취한 각 양식의 시각(perspective)을 대상화해 주제-물로 삼되, 각 화폭을 고도의 기교(virtuoso)로 마무리해냄으로써, 회화사를 재방문하는 메타-‘회화적’-화가(meta-‘painterly’-painter)의 신기원을 창출했다는 데 있다. 그가 회화적 시점을 연구 대상화하고 재조합한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을 통한 대상의 분할과 재조합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게이 특유의 캠피(campy)한 히스토리아(historia) 취향과 말단 페티시(partialism)가 특유의 명사 사회 내부자의 정조와 어우러져, 타인이 모방할 수 없는 호크니만의 메타-양식(포스트모던 양식)이 완성됐다.

6. 제니조가 작업 초기에 데이비드 호크니로부터 큰 영감을 받은 것만은 분명해 뵌다. 2007년의 사진 부조 작업인 <AJ>와 <얼굴 가면(Face Mask)>을 보면, 호크니의 파노라마를 부조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려는 신예의 오마주 충동을 실감할 수 있고, 또 같은 해 제작된 평면 회화 <호크니에게 오마주를(Homage to Hockney)>을 보면, 호크니의 방법을 반복하되 새로이 갱신해보려는 작가의 야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7. 그런 면에서 보자면, 2008년작 <이중의 초상(Double Portrait)>은 과도기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삼면화(tryptich)인데, 이는 새로 이사한 부모의 집을 다각적 시점에서 촬영한 프린트를 엮어 사진 부조로 재구성하고, 그에 입각해 새로이 회화적 시각을 종합해낸 결과다. 호크니의 화풍을 넘어서려는 과욕에 따라 매우 꼼꼼히 제작한 그림인지, ‘회화적’ 회화의 느낌은 실종됐고, 결과적으로 국전풍의 아카데미 페인팅이나 대형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엔 시대착오적 매력이 있다.)

8. 과도기적 양상은, 반사 재질의 정물에 비친 실내 풍경의 왜상(anamorphosis)을 묘사해놓은 미술사적 선례를 연구하고, 그 시선의 시각화 방법을 사진 부조로 차용·재구성한 뒤 한 폭의 회화를 최종 도출해낸 2008년작 <정물(Still Life)>과 사진 부조로 재구성한 가옥의 외부 풍경을 고찰하는 세 시점에 따라 세 폭의 회화를 귀결 지은 2009년작 <집, 나무 그리고 나(House, Tree and Me)>에서 마찬가지로 지속됐다.

9. 아마도 이런 의욕적 접근의 정점에 위치한 작업이, 뉴욕대학교의 커먼스갤러리에 위치한 무대와 벽화를 다중 시점의 사진 부조로 재구성하고 회화로 종합해낸 2009년작, <무대의 시각 인지에 대한 연구(Study of a Visual Perception on a Stage)>였을 것이다. 한데 이 그림은, 한편으론 호크니의 무대 작업을 연상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비논리적 화가의 시각을 논리적으로 포착해낸 결과로 독해되는 터라, 적잖이 흥미롭다. (어쩌면 <무대의 시각 인지에 대한 연구>엔, 뉴욕대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회고하고 결산하는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10. 2010년부터 제니조는 방법에 대한 강박에서 퍽 자유로워진 양상을 드러내는데, 한편으론 사진 부조 작업을 (굳이 회화로 귀결되지 않는) 별개의 독립적 작업으로 삼아 전개하는 모습(예컨대 2010년작 <사진 부조: 프랑코 알비니의 집(Photo Relief: House of Franco Albini)>)을, 다른 한편으론 사진 자료의 재구성에 힘입어 회화만의 시각을 화폭에 구현하는 보다 유연한 모습(예컨대 2011년작 <교회마당(Churchyard)>)을 보여줬다.

11. 이러한 유연한 태도의 등장은 화풍을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 경우가 시선의 교환과 중첩을 하나로 종합한 2011년작 <테이블의 세 사람(Three Men at a Table)>과 <소풍 나온 아홉 사람(Nine Picnickers)>이다. <테이블의 세 사람>이 피사체 간의 시선 교환을 삼면화에 담아내고자 애쓴 결과(인물들[뉴욕 맨해튼의 아파트 관리인 3인]의 시선을 강조하려고 배경을 검게 지워버렸다)라면, <소풍 나온 아홉 사람>은 소풍 나온 아홉 명에게 카메라를 주고 직접 서로를 촬영토록 한 뒤, 그 결과를 삼면화의 풍경으로 조합해내고자 애쓴 결과(리서치 결과에서 일관된 질감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하늘과 잔디 부분의 여백 처리가 다소 어색하다)다.

12. 제니조만의 특징이 잘 드러난 수작은, 2013년작 <다섯 가지 변주: 회랑, 롭 로이드, 군중, 옆문, 창문 풍경(Five Variations: The Corridor, Rob Lloyd, The Crowd, The Next Door, The Window Landscape)>과 <교외 주택지의 막힌 골목(Suburbia Cul-de-sac)>이다.

12-1. <교외 주택지의 막힌 골목>은 원형 캔버스에 나무 액자를 그리고, 그 안에 교외주택지의 막힌 골목 풍경 다섯 가지를 차례로 중첩한 뒤, 한 가운데 마치 볼록 거울처럼 풍경의 왜상을 장치한 작업인데, 보고 또 봐도 흥미로운 의사-광학적(pseudo-optical) 그림이다. (광학적 효과를 십분 활용한 것 같지만, 그 종합 양상은 지극히 회화적이다.)

12-2. 반면, <다섯 가지 변주: 회랑, 롭 로이드, 군중, 옆문, 창문 풍경>은 <다섯 가지 변주를 위한 사진 부조(Photo Relief for Five Variations)>와 짝을 이루는 작업으로, 다섯 장의 캔버스가 여러 차원에서 맞물리도록 교차 편집된 양상인데, 그 각 요소를 짝 지워 보는 맛이 특별한 ‘회화적’ 회화다. 다섯 장의 화폭에서 회색 벽면은 일정한 톤, 질감, 무게 값을 갖도록 면밀히 조절됐고, 나무 바닥의 종류와 질감도 (창밖 설산의 질감과 맞물려) 고도의 조화를 이루도록 재구성됐으며, 주인공이 되는 인물(롭 로이드)의 시선 방향과 군중의 시선 방향과 그림 속 그림의 인물과 군중의 시선 방향은 서로 대조와 균형을 이루도록 고안돼 있다.

13. 후자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노작(勞作)으로서 세 번째 개인전의 주역을 도맡았다면, 전자는 쉽고 빠르게 그려낸 흥작(興作)으로서 전성기의 도래를 알리는, 자연미(sprezzatura) 넘치는 득의작(得意作)이라 하겠다. ///

 

 

 

 

임 근준 AKA 이정우 _ 미술·디자인 평론가, DT네트워크 발기인.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에스케이모마 하이라이트>(2009),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등이 대표 저작이고, 2011년 8월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을 발간했다. 현재 <현대미술방법론: 오늘의 미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제)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