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조




제니 조의 삼각 바퀴: 회화와 망상과 해석의 기묘한 균형, 2014, 임근준 aka 이정우


제니 조는, 대상을 인식-고찰하는 화가의 시지각 체계를,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제 관심사에 따라, 최적화한 회화 양식으로 절충-종합해내는 일에 뜻을 둔 화가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에서 표제어가 됐던, ‘인-비트윈(In-Between)’ 즉 ‘중간자’ 혹은 ‘중개자’는, 작가가 내세우는 작업 방법(method)으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사물을 그리는 것보다는 사물을 보는 내 자신의 시각에 초점을 맞췄고, 그런 계기로 시지각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시간을 두고 대상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무엇을 보는지 보다는 어떻게 보는지에 더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사진 부조(Photo Relief) 작업을 시작했는데, 실제 장면을 촬영하고 이를 사진 부조로 만든 후 다시 페인팅으로 옮겨 표현하는 방식이, 사람의 인식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작업에서는, 실제 촬영한 대상을 사진 부조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입되는 ‘시간성’과 ‘반복성’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페인팅에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통합적 시지각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다. 나는 이를 “인-비트윈(In-Between)”의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대상과 공간의 시각적 인식과 인지의 과정을 유비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자신의 방법을 ‘중간자/중개자(In-Between)’로 명명하고, 그를 통해 다층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통합자로서의 화폭—회화적 인식의 종합자로서의 의의를 지니는—을 그려낸다는 뜻이다. 물론 “통합적 시지각”이란 목표는, 화가 특유의 망상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런 헛소실점(불가능한 목표)은 작가의 회화 충동을 자극하는 원천이 될 것이니 무해한 환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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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화가가 자신만의 방법론적 가설―다분히 인문과학적인―을 세우고 실험작을 반복하기 시작한 때는 2007년경으로, 이후 작가의 작업 세계는 점진적으로 성장해 2009년경 모색기를 넘어선다. 뉴욕대학교의 커먼스갤러리에 위치한 무대와 벽화를 다중 시점의 사진 부조로 재구성하고 회화로 종합해낸 2009년 작, <무대의 시각 인지에 대한 연구(Study of a Visual Perception on a Stage)>는, 작가의 의욕이 그에 상응하는 수작으로 귀결된 첫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 그림은, 한편으론 데이비드 호크니의 무대 작업을 연상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비논리적 화가의 시각을 논리적으로 포착해낸 결과로 독해되는 터라, 적잖이 흥미롭다.)

2010년부터 제니 조는 자신이 설정한 방법을 고수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점차 화가로서의 (준)자율성을 긍정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화풍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 경우가, 시선의 교환과 중첩을 하나로 종합한 2011년 작 <테이블의 세 사람(Three Men at a Table)>과 <소풍 나온 아홉 사람(Nine Picnickers)>이다. <테이블의 세 사람>이 피사체 간의 시선 교환을 삼면화에 담아내고자 애쓴 결과(인물들[뉴욕 맨해튼의 아파트 관리인 3인]의 시선을 강조하려고 배경을 검게 지워버렸다)라면, <소풍 나온 아홉 사람>은 소풍 나온 아홉 명에게 카메라를 주고 직접 서로를 촬영토록 한 뒤, 그 결과를 삼면화의 풍경으로 조합해내고자 애쓴 결과다.
반면, 제니 조만의 특징이 명료하게 드러난 수작/노작은, 2013년 작 <다섯 가지 변주: 회랑, 롭 로이드, 군중, 옆문, 창문 풍경(Five Variations: The Corridor, Rob Lloyd, The Crowd, The Next Door, The Window Landscape)>과 <교외 주택지의 막힌 골목(Suburbia Cul-de-sac)>이다.

<교외 주택지의 막힌 골목>은 원형 캔버스에 나무 액자를 그리고, 그 안에 교외주택지의 막힌 골목 풍경 다섯 가지를 차례로 중첩한 뒤, 한 가운데 마치 볼록 거울처럼 풍경의 왜상을 장치한 작업인데, 보고 또 봐도 흥미로운 의사-광학적(pseudo-optical) 그림이다. 광학적 효과를 십분 활용한 것 같지만, 그 종합 양상은 지극히 회화적이다. 회화적으로 절충된 의사-광학적 다중 시점은, 그림을 마주 바라보며 제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보고자 애쓰는 관객에게 묘한 시각적 자극/도전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묘한 리얼리티―옛 리얼리즘 회화의 낡은 리얼리티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은 듯한―가 발생한다.

반면 <다섯 가지 변주: 회랑, 롭 로이드, 군중, 옆문, 창문 풍경>은, 역시 2013년 작인 <다섯 가지 변주를 위한 사진 부조(Photo Relief for Five Variations)>와 짝을 이루는 작업으로, 다섯 장의 캔버스가 여러 차원에서 맞물리도록 교차 편집된 양상인데, 그 각 요소를 짝 지워 보는 맛이 특별한 ‘회화적’ 회화다. 다섯 장의 화폭에서 회색 벽면은 일정한 톤, 질감, 무게 값을 갖도록 면밀히 조절됐고, 나무 바닥의 종류와 질감도 (창밖 설산의 질감과 맞물려) 고도의 조화를 이루도록 재구성됐으며, 주인공이 되는 인물(롭 로이드)의 시선 방향과 군중의 시선 방향과 그림 속 그림의 인물과 군중의 시선 방향은 서로 대조와 균형을 이루도록 고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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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화가는, 제 관심사를 원뿔 두 개가 서로 꼭지점을 마주한 모양의 간단한 ‘인-비트윈’ 다이어그램―모래시계를 닮은―으로 정식화해왔다. 이 다이어그램은, 한쪽이 실재계라면, 다른 한쪽은 회화계가 되는 개념적 대칭의 구조상이다. 그는 실재계와 회화계의 가운데에서 꼭지점이 마주하는 부분을 ‘사이점’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지점이 화가의 눈(eye)이 문제로 삼는 여러 시선을 하나로 응집하는 개념적 좌표가 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0년까지의 작업에선 실재하는 시공간-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고 재구성한 사진 부조를 사이점으로 간주했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 회화로 옮기는 식이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는 고찰 대상이, 화가의 시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대체됐고, 또 근년에는 눈에 뵈지 않는 서사나 허구 또는 입장으로까지 확장됐다.

2014년 현재 화가는, 자신의 기본 다이어그램을 회전시켜 (중앙에 사이점을 형성하는) 원형 극장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만들고, 그를 개념적으로 확장해 ‘인-비트윈 지도(In-Between Map)’란 걸 만들고 있다. (기본 다이어그램의 한쪽을 깔때기 모양으로 변형하거나 안팎을 뒤집어 붙이고 다시 회전시킨 모델도 있다.) 이를 통해 제 회화 작업이, 조형과 시각 인지 차원에서 심리학·사회학·물리학·현상학적 관심사를 중첩-포괄해내는 개념적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인-비트윈 지도를 통해 원근법, 양식, 도상학, 추상의 역사적 문제를 다시 방문하려는 것일까?

‘아트스펙트럼2014’에 출품할 그의 작업은 크게 네 가지다. 하나는 <풍경 연구: 청색과 노란색 1, 2, 3(Landscape Study: Blue and Yellow 1, 2, 3)>이고, 다른 하나는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Running in Circle Backwards(After Malevich)]>이며, 또 다른 하나는 <패턴 원근법 연구(Pattern Perspective Study)>고, 마지막은 드로잉 등 소품 모음이다.

<풍경 연구: 청색과 노란색 1, 2, 3>은 <다섯 가지 변주>의 세 번째 캔버스에 등장했던 군중의 이미지에서 파생된 작업으로, 작가는 “구체적 시각 자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채 머릿속에 떠오른 군중의 이미지를, 두 가지 톤의 환상적인 느낌으로 표현한 회화적 회화로 구체화하고자 했다. 작업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닥터 수스(Dr. Seuss)의 그림을 떠올리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중세 화가 장 푸케(Jean Fouquet)의 색채와 고졸한 원근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작업에 비하면 상당히 뜬금없는 화풍으로 뵈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화가는 “중세미술의 구식 원근법과 평면적인 색감, 그리고 그것이 허구적 서사를 처리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낀다. 중세미술을 현대적 시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부연했다.

반면,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는,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말레비치의 1932년 작 <달리는 남자(The Running Man)>를 재구성한 그림이다. 작가는 “질서로의 회귀(Return to Order) 시기의 작품들과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 바우하우스 등의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부연했다. 즉,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아방가르드 회화가 천착했던 문제를 다시 다뤄보고 싶었다는 뜻일 터. 원을 그리며 달린다는 표현은, 속된 말로 ‘뺑이 친다’는 뜻, 즉 헛고생을 한다는 말이니, 이 작업은 시대착오적 자세로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내달리는 화가 자신에 대한 우화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미술사의 회화적 역회전’을 반복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모더니즘의 유산을 고전으로 삼은,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신고전주의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한데, 신작 가운데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한 장의 캔버스로 구성된 <패턴 원근법 연구>다. “여태 다중 시점의 원근법을 다뤘는데, 왜 단일 소실점의 원근법을 다룬 그림은 없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뜻에서 그리게 됐다는 이 그림에서 화가는, “원근법적 공간을 평면적인 패턴으로 구성했을 때 나타날 화면의 긴장감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가 화면에 등장시킨 패턴은,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저서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1969)의 제4장 “두 가지, 그리고 두 가지를 함께”에서 인용한 패턴 인지-인식 다이어그램이다. 아른하임은 인간의 시각 인지-인식과 기계의 그것을 비교하며 이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다. 전후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컴퓨팅을 통한 인간의 인지-인식 체계의 재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간과한 문제를, 에둘러 비판하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이어그램으로 평면을 메워 원근법적 환영을 제시하는 게임은, 무엇을 에둘러 지시하고자 하는 것일까? 인간의 시각 인지-인식에 대한 역사적 이해도를 바탕으로 인간의 회화적 고찰 능력을 시험하자는 뜻일까? 이 그림은 마치 회화사의 옛 의제를 유비하는 새로운 신표현주의 회화처럼 뵈기도 한다. 즉, 역시 이상한 방향으로 시대착오적이다.
신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도드라지는 것은, 화가의 ‘화가적 망상’이다. 그가 새로 제작한 원형 극장 형태의 인-비트윈 지도를 바탕으로 바라보면,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는, ‘미술사와 회화의 특정 관계항에서 화가의 욕망에 최적화한 사이점을 도출해 공회전하는 구조를 그려낸 결과’로 독해된다. <패턴 원근법 연구>는, ‘시각 인식-인지 연구의 역사와 회화의 특정 관계항에서 화가의 욕망에 최적화한 사이점을 도출해 유비적 헛소실점의 원근법 공간-구조를 만들어낸 결과’로 해석된다. 제니 조의 망상은 자신만의 성찰적 회화의 생태계를 추구하는 것일까? 자기 참조적 양식화를 거절하는 이러한 행보는, 작가의 커리어에서 어떤 국면/양태를 형성할까?

우리가 어떤 작업이 예술적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할 때, 그 ‘생명’이란, 사물로서의 작품(군)과 작가의 망상과 수용자의 해석이 서로 그럴듯하게 어긋남으로써, 일종의 버뮤다 삼각지 같은 미지의 동적 영역(spiel-raum)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제니 조의 망상은 크게 부풀고 있으니, 캔버스로 귀결된 작품들의 군집과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이 이를 감당할 차례다.

*이 글은 2013년에 작성한 평문, “제니 조 - 현대예술가로서 회화를 제작하는 과업이 의미하는 바”를 변형·보완한 원고임을 밝힌다.

 

 

 

임 근준 AKA 이정우 _ 미술·디자인 평론가, DT네트워크 발기인.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에스케이모마 하이라이트>(2009),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등이 대표 저작이고, 2011년 8월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을 발간했다. 현재 <현대미술방법론: 오늘의 미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제)를 집필하고 있다.